
대체 언제까지 나를
어 린 왕 자
오랫동안 주인 잃은 방이었던 장소는 일 년 전 정돈하고 나간 그대로여서 책 한 권 튀어나오지 않았고 지우개 찌꺼기
하나 책상에 흩어져 있지 않았다. 딸아이가 떠난 뒤 누구도 방을 사용하지 않아 쓸고 닦을 것도 없었지만 얇게 쌓인 먼지라도 훔쳐내는 일이 경숙은 즐거웠다. 스물이 훌쩍 넘겨 술집을 드나들고 성인영화도 예매할 수 있게 된 지 오래라 해도며칠 동안 메시지에 답을 하지 않거나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조금만 가라앉아 있어도 경숙은 아이가 유치원생일 때
그랬듯 당장 젖은 손을 치맛자락에 문지르며 달려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딸아이가 졸업 후 첫 해외여행을 떠나며 짐을
챙길 때도 같은 호텔에 머물지 않아도 좋으니 따라가겠다는 말을 어찌나 힘겹게 억눌렀던가. 이제다 키웠다는 실감이
난다고 아주 홀가분하다는 말을 손짓 섞어 하면서도 집으로 돌아와 불 꺼진 방을 보면 존재의 공백을 제법 아프게 품을
파고들었다. 내일 돌아올 아이는 내가 알던 모습과 달라져 있을까. 머리는 조금 길었을까, 아니면 그새 싹둑 잘라버렸
을까. 마냥 뽀얗고 부드럽기만 했던 피부는 조금 탔을까, 콧잔등에는 주근깨가 조금 생겼을까. 나를 보면 한번 끌어안아줄까, 아니면 멋쩍게 미소만 지을까. 돌아올 아이가 방을 휘 둘러볼 때 눈길이 닿지도 않을 곳까지 솔을 밀어 넣으며
경숙은 기억 속 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갔을 때 그 공책을 발견했다. 누런 박스테이프로 여러 겹 감겨 책상 밑에 고정된 공책은
척 보아도 비밀스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금기를 보면서도 손대고 싶어하는 천성은 인간의 또 다른 본능이기에
이미 성인이 된 딸은 그녀가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을 것이며 구태여 들춰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알면서도 경숙은
솔과 걸레를 내려놓고 거기에 손을 대고 있었다.
종이에서 묵은 냄새가 나고 모서리가 조금 닳은 그것은 일기장이었다.
***
“네 외할아버지와 살면서 떨지 않고 잠든 밤이 없었어.”
소주 한 병과 보글보글 끓고 있는 조개탕은 누군가에게 있어 지난날 속 무겁게 가라앉혀 둔 과거를 꺼내놓기에 좋은
돗자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국자로 국물을 휘젓는 엄마의 표정은 가라앉아 있었고 끓는점에 도달한 국물은
한시도 가만있지 못한 채 들끓었다.
“그래서 내가 망가지는 걸로 네 외할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었지.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거든. 그런데
크면서 느껴지더라고. 그 사람도 선택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거라고.”
엄마는 내 앞에 놓인 빈 앞접시를 가져가 맑은 국물을 붓고 큰 조개만을 신중히 골라 담아 주었다. 죽은 조개가 뽀얀
국물 속에서 입을 쩍 벌리고 차곡차곡 쌓였다. 조개향이 더욱 짙게 났다. 엄마는 그릇을 가득 채운 내용물이 넘치지
않도록 조심히 내 앞에 앞접시를 놓아 주었고 국자로 자기 앞접시에 국물을 부어 후룩 마셨다.
“그러니까 이해해 줬으면 좋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으로 조개껍데기를 집어 앞니로 속살을 긁어냈다. 어린애 살갗처럼 물컹거리는
조개에서 비릿한 즙이 씹을 때마다 흘러나와 입안을 더럽혔다. 아까 엄마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남은 조개를 욱여넣다가 구역질을 한 번 한 덕에 이번에는 태연히 씹어 삼킬 수 있었다.
“조개 영 싫어하더니, 그래도 요새는 잘 먹네.”
조개 냄새가 짙게 밴 입으로 웃어 보였다. 나는 조개가 싫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에도 그랬다. 얼마 전 엄마가 무작정
조개탕을 끓여 놓고 한 번만 먹어 보라고 강권하는 바람에 한 입 먹은 후 간절한 눈동자를 외면하지 못해 맛있다고 한
적은 있었다.
지금은 찾아갈 때마다 용돈을 쥐어주면서도 많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웃으며 다이어트 같은 거 하지 말고 마음껏
먹다 가라는 외할아버지가 어떤 아버지였는지 나는 딱 한 번 경험했다. 내 키가 백사십 센티미터를 조금 넘고 엄마
아빠가 손을 붙잡고 이끌어주지 않으면 학교와 놀이터 아닌 다른 곳에 가지 못했던 때였다. 막내 이모가 밖에서 문을
막고 주먹질과 욕설에 맞서는 동안 나를 지켜줄 유일한 것은 웅크린 몸을 끌어안은 내 두 손뿐이었는데 그조차 덜덜
떨리고 있었다. 뭐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몰라도 바깥이 잠잠해지자 이모가 말없이 들어와 손을 잡아끌었다. 마침내 날
이끌어주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나가는 동안 처음 보는 표정으로 벽에 기대어 있는 외삼촌과 고개를 숙인 외할머니를
지나쳤다. 나는 그날 나보다 다섯 살 많은 막내 이모의 손에 이끌려 근처에 사는 큰이모 댁으로 피신을 갔다.
그날은 ‘뭔가 잘못된’ 날이었고 ‘평소와 다른’ 날이었으며 ‘알면 안 되는’ 날이었기에 내가 그 일을 엄마에게 털어놓기까지는 몇 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몇 년은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인지하고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숙성시키는
시간이었다. 이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냈을 때 몰아칠 후폭풍을 견딜 준비를 한 채 물웅덩이 위에 뜬 기름처럼 휘도는
감정을 정제된 말로 정리하고 조리와 이성을 덧붙여 그날의 경위를 설명한 후, 정면을 응시하던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가 칼이라도 뽑아들고 외할아버지를 쫓아가 따진다거나 품에 안고
머리를 쓸어주며 고생했다고 말해주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게는 단 한순간이었던 일을 엄마는 유년기 대부분에
걸쳐 겪었으며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되는 동안 엄마가 멋대로 외할아버지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엄마는 내게 사랑의 매를 빙자한 회초리를 들거나 하다못해 위협할 목적으로 손을 확 들어올리는 일조차 없었다. 외할아버지의 자식으로서는 추앙받아 마땅할 일이었으나 문제는 한 자식의 어머니로서도 딱 거기까지였다는 데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의 흔하디흔한 어느 월초였어야 했다. 칠판에 붙은 자리배치표를 보고 나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고다른 여자아이들은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내 옆자리에 배정된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들이 질색할수록 뒤를 졸졸
쫓아다니거나 애정표현을 서슴지 않는 아이로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짝이 된지 정확히 3일 만에그 남자아이가 내게 물었다.
“야, 너 오늘 무슨 색 속옷 입고 왔냐?”
그 후 몇 달 동안 자리를 바꾸는 일은 없었고, 나는 어렸기에 무지했으며 나약했다. 내가 겪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것을 명확히 호명할 단어는 알지 못했으나 그 아이가 내게 하는 말을 남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만큼은
알았다. 내가 엄마에게 몇 달 동안 거듭 말했던 ‘짝꿍 남자애가 나를 괴롭힌다’는 표현은 내가 겪고 있는 모든 일을
포괄한 문장이었으며 당시 내가 할 수 있던 최대한의 구조 신호였는데 그때마다 엄마의 대답은 같았다.
“걔가 너 좋아하나 보다.”
남자아이가 휘두르는 모든 종류의 폭력은 호감을 표시하기 어려운 부끄러움에서 비롯된 것이며 거기에 희생되는
여자아이에게는 이해를 가장한 인내가 강요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엄마를 붙들고 읍소하는 일이 멈추지
않자 어느 날 엄마는 내 손에 사탕을 쥐어주었다.
“이거 들고 가서 걔 줘.”
나는 그 사탕을 들고 가서 나를 ‘괴롭히는’ 아이에게 건넸다. 그 일이 며칠간 이어졌고 그 남자아이는 너희 엄마가 날
좋아한다는 망발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엄마 딴에는 잘해주면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내놓은 대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먹음직스럽게 포장된 둥근 수치심과 모멸감을 기억한다. 나를 몇 번이고 성희롱했던 아이에게 내 손으로
선물을 건넬 때의 그 순간을, 엄마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나아질 거라는 희망만을 붙들고 몇 번이나 그 일을 해내던 나를
기억한다. 그 아이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은 채 4학년이 끝났고 나는 그 아이가 같은 반이 되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그 이듬해 나는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반 아이들이 입을 모아 나를 욕하는 인터넷 카페를 보고서도 엄마는 학교에
항의 전화 한 번 걸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께 이메일로 카페 링크를 보내는 것은 나의 일이었으며 다음날 네가 신고
했냐고, 왜 신고했냐고, 너 하나 때문에 애들 다 혼나고 있는 거 안 보이냐고 비난하는 가해자들을 버티는 일 또한
오롯이 나만의 몫이었다. 누구도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를 피해 숨어서 떨고 있을 때도, 나를 괴롭히는 아이가 있다고 호소할 때도, 내가 부당하게 따돌림당하고
있을 때조차도, 엄마는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싸워 주지 않았다.
그 모든 일을 겪고서도 내가 엄마에게 따져 묻거나 반항하지 않았던 이유는 좋은 음식이 있으면 엄마가 반드시 집에
따로 싸 왔으니까, 소풍 전날에는 해가 뜨기 전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싸 줬으니까, 나들이를 나가서 찍은 내 사진을 보며
봄날 민들레처럼 웃었으니까. 그때마다 나는 크게 벌렸던 입을 닫았고 엄마는 착한 딸이라며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칭찬했다. 미술을 시작한 다음부터는 엄마에게 그려 준 습작용 그림도 칭찬거리가 되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고
아직도 생각하지만, 마찬가지로 어떻게 멈췄어야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과제용 그림 한 번 봐 달라며 엄마에게 이미지 파일을 전송한 적이 있었다. 한물간 이모티콘을 잔뜩 붙이며 너무
예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기에 안심하고 제출했다. 얼마 뒤 엄마 페이스북에 내 그림이 그대로 올라가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미 여러 명이 댓글을 달았고 누가 공유해갔는지 일일이 확인하기 어려웠다. 성대 아래까지 차오르는 붉고 뜨거운
단어들을 느끼며 전화를 걸려다 멈췄다. 엄마 딴에는 ‘자랑스러워서’ 올린 것이고 내가 거기에 화를 내면 서운함을
감추지 않을 것이 눈에 선했다. 결코 원치 않은 일이었지만 그냥 넘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틀 뒤 친한 이웃 아주머니에게서 그림 참 예쁘다는 전화를 받았고 내 그림을 인쇄해 액자에 담은 사진이 전송되었다.
닷새 뒤에는 친구에게서 우리 엄마가 네 그림 참 예쁘다고 하더라는 메시지가 왔다. 친구의 어머니는 이웃 아주머니가
주최하는 교회 순모임 참가자였다.
기어코 본가로 내려가 처음으로 내내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죄책감에 가까웠던 잡다한 모든 감정들을 분노가
누르는 순간이었는데 분노가 몸을 가득 채우고서도 입을 열기까지는 몇 그램의 용기가 더 필요했다. 용기내어 맞서면
좋은 결과가 따라올 거라고 막연히 믿었던 걸 떠올리면 그때까지도 아직 순진했던 것 같다.
“자랑스러워서 그런 거야. 자식이 잘되는 건 부모의 제일 큰 기쁨인걸.”
“엄마가 이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냐? 엄마한테 그 정도 권리도 없어?”
“예술가 되겠다고 했으면 이런 일은 각오했던 거 아냐? 너 왜 이렇게 예민한데? 꼭 엄마 이렇게 서운하게 할래?”
엄마는 나를 더없이 사랑했으나 나를 존중한 적은 없었다.
너무도 늦은 깨달음과 함께 내 미련과 죄책감은 거기에서 부서졌다.
나는 내일 유럽으로 떠난다. 졸업 전시회에 교수님 지인으로 참석한 큐레이터가 내 그림을 보고 고맙게도 전시회
제안을 해 왔다. 제법 이름 있는 전시회기에, 갓 졸업한 신인 신분으로 그림 한 점이라도 내는 건 큰 영광이다. 일 년간의
전시회를 마치고 돌아올 동안 이 일을 아는 것은 절친한 친구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