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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사회적 거리두기​

낭  만  케  로

어느 덧 봄이 다가왔다. 자연은 배신을 하지 않는다고 누가 그랬던가, 꽃은 올해도 어김없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었다. 그러나 꽃놀이를 비롯한 지상의 온갖 떠들썩한 축제는 열리지 않았다. 지상에 끔찍한 역병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 나타나는 역병이 늘 그렇듯 치료를 할 수 있는 명약은 아직까지는 없다고 한다. 그러니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하고 집집마다 문을 걸어잠근 채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일 뿐이었다.

그러나 신이라고 별 수가 있는가. 가뜩이나 자신이 관장하는 것 외에는 힘을 쓰기 어려운 신들은, '사회적 거리두기'

라는 이름 아래 예배조차 줄어들자 더욱 힘을 잃었다. 급기야는 신들끼리도 당분간은 만남을 자제하는 것이 옳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역병을 퍼뜨린 이가 어떤 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화가 풀릴 때까지 신들 역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게 되었다.

 

 

[구옥공, 강녕하신가?

밤에 잠이 오지 않기에 붓을 들었네. 지난 달 길동을 데리고 곶감을 싸간 이후론 바빠 통 연락을 하지 못 했다네.

장고 군은 잘 지내는지 궁금하구려. 공의 보좌를 볼 때마다 어찌하면 그리 늠름한가 싶다네.

물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어린 아해들이지만 곁에서 내가 안 보이면 불안해하는 길동을 보다보니 대견스럽게

느껴질 때가 한둘이 아닐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건만, 내 길동의 버릇을 잘못 들여두는 건 아닌가

걱정이구먼. 필시 장고 군은 공의 똑부러진 성격을 닮은 것이겠지.

나도 길동이 본 받을만한 선생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생각한다네. 무탈히 지내고 봄이 지나기 전에 또 봅세나.]

 

 

그러던 중 종이의 신인 저선생에게서 반가운 선물이 날아왔다. 거대한 종이학이 꿀떡과 진달래떡, 그리고 편지를 든 채로 날아온 것이다. 역병이 채 퍼지기 전 저선생과 구옥과, 각 신의 보좌관인 길동과 장고, 이렇게 네 명이서 오손도손 이야기꽃을 피우던 때가 엊그제같은데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니. 구옥은 미소를 띈 채 바로 답을 하기 시작했다.

 

 

[보내주신 꿀떡과 진달래떡과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저 선생님의 인품처럼 고운 글씨에 담긴 마음에 제 마음에도 봄이 찾아온 기분이었습니다.

장고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제는 봄이 되어 이불을 얇은 것으로 바꾸어주었는데 제법 신이 난 모양이었습니다.

길동 관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같던데 편지가 아직 당도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가끔 길동 관과 저 선생님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표현이 서툴다보니 장고에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많아서요. 오히려 길동 관의 그런 모습이 사랑스럽지 아니한가요?

선생님도 필시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습니다.

답례로 무어라도 보낼까 고민하다 귤이 조금 남아 보내드립니다. 날씨가 변덕을 부리니 조금이라도

찰 때 귤차를 끓여먹으면 맛이 좋을 듯합니다. 부디 무탈하시어 다음에 또 만나기를 바라겠습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종이에 유려한 필체의 글씨가 가득찼다. 붓글씨가 마르기를 기다리며, 구옥은 장고의 방으로

향했다. 작년 겨울에 구해둔 귤이란 귤은 죄다 장고의 방 옆에 마련한 창고에 두었다. 애초에 장고가 이불 속에서

하나둘 까먹는 모습이 귀여워 장만한 것이었다. 혹여 장고가 싫다 하면 어쩌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니 어느 새 방문 앞이었다. 문은 열려있었다.

 

 

"얘, 장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두컴컴한 방이 보였다. 장고는 이불을 반쯤 덮은 채 세상 모르고 잠들어있었다.

구옥은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방 안으로 들어서서 장고에게 다가갔다. 어둠이 눈에 익자 머리맡에 놓여진

귤 바구니와 낯선 책이 보였다.

 

 

[지난 일 년 간의 기록]

 

 

밑에는 조그맣게 연도가 써구옥은 슬쩍 장고를 보았다. 장고는 여전히 꿈나라에 있는듯 보였다. 잠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맨 마지막 장을 펼쳤다. 장고의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벌써 새해가 하루 남았다. 지상의 인간들은 우리와 셈이 달라 진작 새로운 해로 살고 있지만

그래도 몇몇 인간들은 우리처럼 내일도 함께 기린다고 한다. 나는 어느 쪽 행사던 참으로 좋아한다.

그래도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내일을 고를 것같다. 구옥님이 내일을 더 좋아해서이다.

내일은 구옥님이 떡국을 만들어주신다고 하셨다. 매년 구옥님은 떡국을 만들어주셨는데 엄청 맛있었다.

구옥님이 정성을 가득 담아 만들어주셔서 더 맛있는 것같다. 구옥님은 정말로 못하는 게 없으신 것같다.

떡국을 먹고는 저선생님께 놀러가기로 했다. 길동이와 같이 연도 만들어서 날리고 윷놀이도 해야지.

내일은 정말 재밌는 새해가 될거다.]

 

 

구옥은 조용히 일기를 덮고는 장고를 보았다. 역병이 잠잠해지려면 아직도 오랜 시간을 버텨야할 것이다. 어쩌면

역병이 잠잠해진 후에도 한동안은 조심해야할테니, 저선생과 길동을 만나려면 더욱 긴 시간을 기다려야할 것이다. 그 동안 장고에게 좋은 말동무, 좋은 놀이상대가 되어주어야할텐데.

장고의 흐트러진 이불을 잘 덮어주고는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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